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 관계 (문단 편집) === 20세기 ===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를 후원하였으며, 그 결과 파키스탄에서는 [[아흐마디야]]파 신자들이 메카에 성지 순례를 제한할 목적으로, 아흐마디야 신도의 경우 여권(...) 등에 별도 표시를 하는 경우가 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파키스탄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의 세속주의/민족주의 성향을 경계하여 파키스탄의 야히아 칸 정권을 적극 지원하였던 바 있다. 이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상당수의 무자헤딘들을 파견시킴과 동시에 파키스탄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소련군이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탈레반]]을 지원하였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에도 관여했다. 사우디 왕실의 행보를 자세히 보면, 일단 국내 활동에 초점을 맞춘 테러 활동 및 테러 조직은 보안군을 동원해 철저히 탄압하고, 극단주의 방지라는 미명하에 테러리스트들을 풍족한 삶과 결혼, 돈으로 회유하며 테러리즘을 그만두게 설득하는 행위도 한다. '''그러나''' 사우디 외적으로의 이슬람 극단주의 지원이나 [[체첸]],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 등 전세계 해외 테러조직으로의 인적, 물적 자원 유입은 묵인하거나 오히려 물적 지원을 비롯해 대놓고, 또는 비밀리에 후원, 장려하고 있다. 이 정책이 본격화된 계기는 바로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다. 당시 미국이 소련을 엿먹이기 위해서 아프간 개입을 결정하자 사우디가 발벗고 나서서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였다. 당시 사우디 왕실은 와하브파 율법학자들과 합작으로 지하드를 선동해서 국내의 불만세력들과 실업자들의 상당수를 파키스탄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서 반소무장투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에서 운영하던 무장캠프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은 뒤에 아프가니스탄으로 침투해서 CIA의 정보지원을 받으면서 소련과 싸웠다. 그리고 인력모집, 수송, 군사훈련, 식량, 군수품보급 등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사우디가 부담했다. 이렇게 양성된 무자헤딘이 무려 20만명에 달한다. 그리고 소련군의 철수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사우디 정부는 체제불안을 이유로 이들의 귀국을 불허했다. 이제 목표도 상실하고 갈데가 없어진 이들은 새로운 적을 찾아서 이합집산을 하면서 세계 각지로 퍼지는데, 바로 이들 중에 일부가 결집한게 '''[[알카에다]]'''와 '''[[탈레반]]'''이다. 당시 무자헤딘 시절 형성된 인맥들이 현재의 모든 이슬람근본주의 무장조직, 테러단체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사우디 왕실과 파키스탄 정보부 그리고 미국 CIA가 합작으로 키운 무자헤딘이 2010년대 IS까지 이어지는 모든 순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테러단체의 뿌리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우디의 재벌 2세이자 독실한 와하브파 무슬림이였던 '''[[오사마 빈 라덴]]'''도 1980년대 지하드 선동에 낚여서 아프간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테러조직의 수괴가 된 것이다.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것은 파키스탄의 지원이 매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때도 실질적으로 자금을 댄 것은 사우디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